먼저 짚을 것은, 하나님이 "빛"을 "빛"이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빛"을 "낮"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이미 있는 것에 같은 이름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빛(오르)에 '낮'이라는 새로운 정체와 기능을 부여하셨습니다. 빛은 물리적 실체이고, 낮은 그 빛이 어둠과 나뉘어 만들어내는시간의 질서입니다. 빛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그 빛을 낮이라고 부르심으로써 빛을 단순히 밝음을 넘어서, 하루를 구성하는 시간의 한 축으로 세우십니다. 3절을 해석할 때 이미 정리했듯, 첫째 날의 창조는 밝음의 창조를 넘어시간의 리듬 자체의 시작일 수 있는데, 이 이름지음이 바로 그 시간 질서를 확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빛'의 창조를 '시간'의 창조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는 태양이 빛의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빛의 근원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여러 차례 이름을 지으시는데, 그때 직접 이름 지으신 것은 셋뿐입니다. 1) 낮과 밤(1:5), 2) 하늘(1:8), 3) 땅과 바다(1:10). 모두 첫 사흘, 곧 구분(바달)의 날들에 집중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지음이 주로 구분을 통한 질서를 세우시는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채움의 날들(넷째~여섯째)에는 하나님이 직접 이름 짓지 않으십니다. 근본 골격을 세우는 일에만 친히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뒤에서 다루겠지만 인간과의 동역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2. 이름지음 = 주권의 행사
고대 근동 세계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존재를 규정하고 다스리는 주권 행위였습니다. 에누마 엘리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위로 하늘이 아직 이름 불리지 않았을 때, 아래로 땅이 아직 이름 갖지 못했을 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질서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을 얻는 순간 비로소 존재가 되고 세계의 질서 안에 자리를 얻습니다. 성경에서 '이름 짓는 이야기'와 관련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야곱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신 것은 그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하신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성을 지은 뒤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 자기 후손, 자신의 업적이 이름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죽어도 이름이 남는다면 이는 불멸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벨탑을 지으려는 인간들의 의도는 "우리 이름을 내고.."(창11:4)였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방증입니다.
반대로 이름이 잊혀진다, 지워진다는 것은 최악의 저주였습니다.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아케나톤은 사제 계급에 맞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그가 죽은 후 그의 개혁은 전부 되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때 아케나톤의 이름도 이집트 전역에서 지워졌습니다. 이는 아예 그의 존재를 우주와 역사에서 지워버리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처럼 이름과 존재는 얽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이름을 짓는다는 말은 곧 그의 존재를 규정하고,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낮과 밤을 이름 지으심은 그것들에 대한 통치권의 선포입니다. 빛, 낮, 밤.. 이것들은 모두 신성이 박탈됩니다. 낮도 밤도 스스로 존재하는 신적 실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름 붙여 다스리시는 피조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신으로서 이들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강의 내내 강조해 온 반신화(Anti-Myth)의 핵심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밤은 두려운 신적 세력이었고 낮은 태양신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하나님은 그것들에 그저 이름을 붙이심으로써 — '낮'과 '밤'이라는 평범한 시간의 이름을 주심으로써 그 신격을 벗기십니다. 이름지음이 곧 탈신화화입니다. 신이었던 것을 이름 불러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3. 김춘수의 '꽃'
이름이 존재에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통찰은 여러 문화가 감지해온 것입니다. 근대 시인 김춘수도 「꽃」에서 이를 노래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이름 불리기 전에는 단순한 몸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름 불린 후 그것은 '꽃'이라는 존재가 되어 그 이름 지은 이에게 다가온다는 이 아름다운 시는, 이름이 익명의 비존재를 관계 안의 '너'라는 존재로 만든다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통찰이 창세기 1장 5절을 해석하는 빛을 제공합니다. 이름 불리기 전은 규정되지 않은 혼돈(토후 바보후)이고, 이름 불린 후는 정체를 얻고 관계 안에 자리한 질서(코스모스)로 세워집니니다. 빛이 '낮'이라 불리자 우리가 살아갈 시간의 리듬이 되고, 어둠이 '밤'이라 불리자 쉼과 잠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김춘수의 '꽃'과 창세기 1장의 말씀 사이에는 거리와 간격도 존재합니다. 누가 이름 짓는가? 하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춘수의 시에서 이름 짓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의미가 인간의 인식과 명명에서 태어납니다. 이것은 근대적·실존적 관점을 내포합니다. 인간이 주체로서 대상을 불러주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죠. 인간이 불러주지 않는 세계는 무의미로 남습니다. 인간이 의미를 창조합니다. 칸트식으로 말해서 인간이 자연의 입법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 이름 짓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낮과 밤은 인간이 그렇게 부르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서 낮이고 밤이었습니다. 세계의 의미는 인간의 인식에 앞서 이미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파이송에서 발견한 진실, 인간이 창조하기 전에 먼저 음악이 존재했으며, 음악은 인간이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는 진실이 보여주는 바입니다. 아름다움이 인간이 발명한 취향이 아니라 발견한 질서이며 인간 이전에 이미 우주 안에 있었듯이 세계의 의미와 이름도 인간의 명명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명명 안에 있었습니다. 음악이 인간 이전에 우주 안에 있었다고 했던 그 통찰은 이름지음에서도 확인됩니다. 인간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이름 지어 의미를 담아두신 세계를 읽어내는 자입니다.
이 차이는 4절, 우리가 봄과 의식을 논하며 도달한 지점과도 이어집니다. 우주 초기의 빛이 볼 자 없어 색이 되지 못했으나, 창세기의 빛은 처음부터 보시는 분 앞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낮과 밤은 그것을 부를 인간이 있기 전에 이미 부르시는 분 앞에서 이름을 얻었습니다. 봄이 존재보다 앞서듯, 명명도 인간보다 앞섭니다.
4. 인간에게 위임된 이름지음 (창세기 2장)
그런데 여기 반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1-3일의 '바달'을 통한 창조를 통해서 우주의 근본 골격(낮·밤·하늘·땅·바다)을 만드실 때, 친히 이름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4-6일의 창조물에 대해서 이름짓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중 꽤 많은 것들, 특히 생물들의 이름 짓는 일은 인간에게 위임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9)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직접 이어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 곧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과 비슷하게 '이름 짓는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왕의 대리 통치자, 전권대사입니다. 그리고 명명은 바로 그 위임된 통치의 구체적 형태입니다. 하나님이 낮을 다스리시려 '낮'이라 부르셨듯, 인간은 짐승을 이름 부르며 그것들을 자신의 관계와 책임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듯 인간은 땅의 통치자입니다.
인간이 이름 짓는 자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는 작은 창조자임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파이송을 논하며 확인한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인간은 무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두신 창조 세계에서 창조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매개하는 자입니다. 이름짓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존재를 무에서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지으신 존재에 이름을 주어 관계 안으로 들입니다. 뉴튼은 '중력'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명명'했습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과학적 발견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의 명명은 하나님의 명명을 본받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김춘수가 「꽃」에서 노래한 그 명명, 인간이 불러줌으로써 존재가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실은 창세기 2장에서 인간에게 위임된 권한에 대한 증언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은, 인간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명명권자이고, 통치권자라는 사실입니다.
5. 정리 — 두 겹의 명명
정리하면 하나님의 이름지음은 세 층으로 읽힙니다.
첫째, 이름지음은 주권과 탈신화화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낮과 밤을 이름 지으심으로 그것들의 신격을 벗기고 피조물로 다스리십니다. 신이었던 것이 시간의 이름을 얻어 질서 안에 자리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명이 인간의 명명에 앞섭니다.
세계의 의미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전에 이미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아름다움과 음악과 질서가 인간 이전에 우주에 있었듯이, 낮과 밤도 인간이 부르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서 낮과 밤이었습니다. 인간은 의미의 저자가 아니라 발견자입니다.
셋째, 그 명명의 권한이 인간에게 위임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짐승을 이름 부르며 창조에 참여하는 작은 창조자가 됩니다. 김춘수가 노래한 인간의 명명은 바로 이 위임된 권한의 아름다운 증언이되,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앞선 명명에 뿌리를 둡니다.
빛을 '낮'이라 부르심은 그러므로 단순한 라벨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태양신의 영역이던 낮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시간으로 세우는 주권의 선포였고, 인간이 그 시간을 살아가기 전에 이미 그 시간에 의미를 담아두신 사랑의 예비였습니다. 우리가 매일 맞는 '낮'과 '밤'이라는 그 평범한 이름 안에, 혼돈을 질서로 부르시고 그 질서에 우리를 초대하신 창조주의 명명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대개 하나의 동작으로 기억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대로 되니라." 존재를 불러내는 그 말씀.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창조는 하나의 박자가 아니라 두 박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부르심) 하나님이 빛을 보시니(וַיַּרְא, 와야르) 좋았더라(כִּי־טוֹב, 키 토브)" (창 1:3-4)
첫 박자는 부르심(calling)이다. 없던 것을 있게 하는 말씀. 하나님은 만물을 없는 데서 불러내셔서 있게 하신다.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은 ..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지금까지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을 지나치게 구원이나 직업 소명으로 이해해온 기독교 전통은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시다. 특히 '창조'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 행위이다.
둘째 박자는 보심(seeing)이다. 있게 된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 우리는 보통 첫 박자에만 주목하지만, 정작 창세기 1장이 집요하게 반복하는 것은 둘째 박자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조 기사에서 일곱 번이나 울린다. 부르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끈질기게, 본문은 하나님의 보심을 반복한다.
왜 창세기는 보심을 이토록 강조하는가? 존재를 불러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왜 굳이 보시고, 값을 매기시고, 좋다 하시는가? 이 물음을 따라가면, 우리는 뜻밖에도 현대 물리학과 철학이 아직까지 씨름하는 가장 깊은 신비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신비의 뿌리에서, 창조의 첫날 빛을 보시고 "좋다" 하신 그 시선을 다시 만나게 된다.
1. 봄 없이는 우주가 없다
중요한 철학적 질문은 이것이다.
1) 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가?
2) 왜 우주의 모든 것이 다른 방식이 아닌, 지금의 이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3) 왜 지금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우주를 인식하는 존재가 존재하는가?
첫 번째는 훨씬 더 근원적인 질문이고, 두 번째는 파인튜닝(미세 조정)의 문제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는 세 번째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의식과 존재 사이의 관계의 문제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만일 우주를 인식하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우주는 존재하는가? 물론 당연히 인식과 무관하게 우주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를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때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음'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 문제를 철학자 버클리가 천착했다. 그는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버클리의 논리를 따른다면 이런 결론에 이른다:
'지각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도 미스테리이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도 신비이다. 그런데 진짜 신비는 우주가 존재하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파스칼이 말한 것의 의미이리라. "그러나 우주가 그(인간)를 무찌른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우주)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2. 봄 없이는 색도 없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빛의 수많은 파장 중에서 가시광선의 파장대는 매우 좁다. 인간은 그 가시광선 파장 영역의 빛을 보고 뭔가를 본다. 특히 색을 본다. 빨주노초파남보, 색이 눈에 보인다. 파장이 색으로 보인다.
우주는 빛으로 시작했다. 빅뱅 후 약 38만 년, 우주가 식어 빛이 처음으로 자유롭게 풀려났을 때, 그 빛의 파장은 약 3,000K로 흑체복사를 시작했다. 계산하면 붉은색에서 근적외선 경계 부근이다. 붉은 파장의 복사가 온 우주를 균일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빛을 볼 눈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붉은 파장은 실재했으나, 이를 "붉음"으로 보는 인식은 없었다. '붉음'은 '봄'으로써만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색은 순수한 물리적 사실이 아니다. 700나노미터라는 파장은 물리량이지만, 붉음의 "그 붉은 느낌"은 파장 안에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봄'의 행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 느낌은 파장이 어떤 눈과 어떤 의식에서 처리될 때 비로소 태어난다. 볼 자가 없으면, 파장은 있어도 색은 없다. 우주 초기의 그 붉은 복사는, 경험하는 의식이 없었기에, 색이 되지 못한 채 흘러갔다.
여기에 이 에세이 전체를 관통할 첫 번째 통찰이 있다. 칸트가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존재하는 것과 보여지는 것은 다르다. 무언가가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보고, 인식하고, 경험하는 '봄' 곧 '시선'이 있어야 한다. 파장이 색이 되려면 봄이 있어야 하듯이, 창조가 완성되려면 보심이 있어야 한다. 사실상 '봄'이 존재를 완성한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빛을 존재하게 하신 후, 곧바로 그것을 보신다. 그리고 그때 빛의 존재는 단순한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좋은 것(טוֹב, 토브)"으로 평가받는다. 인식은 단순히 외계 대상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식은 판단과 평가를 동반한다. 하나님은 빛의 '존재'를 보시고 그 '가치'를 인정하셨다. 그때 비로소 빛은 온전하게 존재하게 된다. 우주 초기의 빛이 볼 자 없어 색이 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빛은 봄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보시는 분 앞에 있었기에 좋음이 되었다. 봄이 존재를 값 있게 한다.
3. 근대의 봄과 그 붕괴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봄'이라는 행위의 창조적 능력을 간과해 왔다. 서구 인식론의 주류는 봄을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투명하고 수동적인, 그저(just) '대상을 수용'하는 것으로 여겼다. 데카르트 이후의 주체-객체 이분법에서, 관찰자는 세계 바깥에 서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이었다. 즉 봄은 대상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중립적인 창(窓)과 같은 것이었다. "객관적(objective)"이라는 말 자체가 '보는 자와 분리된 대상(object)'을 전제한다. 이것이 근대 과학의 이상이었다. 관찰자는 실험에 개입하지 않고, 자연을 저 바깥의 사실로 읽어낸다. 이때 봄과 대상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20세기 물리학이 이 전제를 흔들었다.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는, 대상의 성질이 관찰 맥락과 분리되지 않음을 드러냈다.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측정을 하느냐에 따라 한쪽 면이 나타난다. 이중슬릿 실험에서, 경로를 측정하는 장치를 놓으면 간섭무늬가 사라지고, 놓지 않으면 나타난다. 빛의 '파동성을 관찰하기 위해서 실험을 설계하면' 빛은 '파동'으로 보이고, 빛의 '입자성을 관찰하기 위해서 실험을 설계하면' 빛은 '입자'로 보인다. 어떻게 보느냐가 대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양자역학의 세계를 현실 세계와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관찰자의 마음이 실재를 창조한다"는 식으로 과장해도 안 된다. 결과를 바꾸는 것은 실험자의 동기나 바람이 아니라, 어떤 물리적 측정 장치를 설계하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장치조차 갑작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특정한 물음을 품고,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것이다. "이 빛이 어느 경로로 가는가"를 물으면 빛의 입자성이 보여지고, "어떤 간섭무늬를 이루는가"를 물으면 빛의 파동성이 드러난다. 장치는 물음의 물질적 구현이다. 즉 이 실험 장치를 통해서 나의 관찰하고자 하는 관점이 관찰 결과와 얽히게 된다는 말이다.
봄이 자명하거나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보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 그런데 빛을 보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빛이다. 빛이란 광자로서의 성질을 지닌다. 빛 안에 빛 알갱이가 있는 것이다. 이 빛 알갱이가 있어야 모든 '봄'이 가능하다. 물론 하나님은 빛 알갱이 없이도 모든 것을 보시겠지만 인간이나 동물은 광자 없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빛 없이 봄도 없다. 빛 알갱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그런데 무한히 작은 소립자를 관찰하고자 할 때, 빛을 쏘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빛 알갱이가 관찰하고자 하는 소립자를 튕겨내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영원히 소립자를 관찰할 수 없다.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대로 우리는 소립자의 위치를 알거나 운동량을 알거나 둘 중에 하나 밖에는 알 수 없다. 그는 이를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관찰, 즉 봄은 자명하거나, 투명한 행위가 아니다. 관찰하고자 하는 그 행위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근대적 이분법은 무너진다. 봄은 세계 밖에 위치한 중립적 거울이 아니라, 어떤 물음을 던지느냐로 세계에 참여하는 행위다. 물리학자 존 휠러가 이를 "참여하는 우주"라 불렀다. 관찰자 없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우주는 없다. 보는 자와 우주는 함께 참여하여 우주를 만든다.
It from bit.
It(우주)는 bit(정보), 곧 의도, 의식으로부터 온다.
하지만 인간의 '관찰'이라는 이 참여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어떤 물음을 던질지는 선택하지만, 실재가 무엇으로 답할지는 정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고 의도한대로 대상이 응답한다는 말은 아니라는 말이다. 관찰자가 "경로를 측정하겠다"고 물을 수는 있어도, "이 전자가 왼쪽으로 가기를 바란다"고 결과를 정할 수는 없다. 물음의 틀은 우리가 세우되, 그 틀 안의 대답은 우리 밖에서 온다. 대상은 우리 의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밖에 실재한다. 즉 인간의 봄은 '참여'이되 '창조'는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게 질문을 선택할 자유는 있으나, 답을 지어낼 권능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봄은 존재를 완성시킨다.
4. 마음의 난제 — 왜 우리는 보는가
이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자. 봄과 대상의 관계를 넘어서, 봄 그 자체의 신비로. 여기서 우리는 철학이 "의식의 어려운 문제(the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라 부르는 벽과 마주친다. 대체 왜 인간은 보게 된 것일까?
'본다'를 물리적으로만 기술해 보자. 파장이 각막을 지나 망막에 도달하고, 원추세포가 광자를 흡수하고, 신경 신호가 시각피질로 전달되고, 특정 뉴런이 발화한다. 이런 의식의 하드웨어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을 '의식의 쉬운 문제(easy problem)'라고 부른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의식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추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기술을 마쳐도, 건드리지 못한 것이 남는다.
그 모든 물리적 과정에 왜 "붉음을 실제로 보는 그 경험"이 동반되는가?
혹자는 이를 진화 과정으로 설명한다. 자, 그들의 말대로 인간이 진화 과정에 따라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러나 대체 왜 그런 '봄'이 진화 과정에 필요하게 된 것일까?
인간 뇌 속의 뉴런의 발화는 관찰 가능한 물리적 사건이다. 그것이 설명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붉은 색을 보고 "그 '붉은'이라는 느낌"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을까? 이 1인칭적 경험이 왜 진화 과정에 필요하게 되었느냐는 말이다. 가령 식물은 빛을 향해 줄기를 뻗어간다. 이를 빛의 향광성이라고 한다. 분명 '빛'이라는 자극에 반응하고 있다. 그런데 식물이 우리가 빛을 보는 것처럼 '빛을 본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왜냐? 식물은 조리개, 망막 같은 것이 없으니 말이다.
벌레는 특정 화학 물질을 향해 근접하거나, 회피한다. 벌레의 화학주성은 벌레의 생존률을 높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질문이 가능하다. 인간은 빛을 포함한 외부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기만 하면 생존률을 높이는 데 충분하지 않은가? 왜 인간은 굳이 보게' 된 것일까? 생존과 번식에 '봄'이 필연적으로 요구될까? 그리고 그 '봄'이 반드시 '의식'이라는 지금의 이 방식으로 발현될 필요가 있었을까? 물리적 봄(광학적·신경적 과정)에서 경험적 봄(그것이 어떠한지)으로 넘어갈 때, 존재하는 이 도약이 '의식의 난제'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본다'는 말 안에 그 물음의 핵심이 자리하고 있다.
의식의 난제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내는 것이 철학적 좀비 논증이다. 나와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존재를 상상해 보자. 같은 뉴런, 같은 반응, 같은 행동. 위험을 피하고, "아프다"고 말하고,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안에 아무런 내적 경험이 없다면? 불이 꺼진 채 기계처럼 작동만 한다면? 이것은 마치 식물이 빛을 향해 기울어지더라도 빛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벌레가 특정 화학주성을 보이더라도 의식을 가진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 좀비는 생존과 번식하는 데 어떠한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똑같은 방식으로 눈을 뜨고, 뭔가를 본다는 말도 한다. 그런데 그 좀비는 우리와 같은 붉음이라는 그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화 과정은 이러한 철학적 좀비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왜 굳이 '의식'이라는 경험을 가지는 방식으로 진화가 된 것일까?
철학적 좀비가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은 AI와 자연스럽게 대화한다. 심지어 감정 교류까지 한다. 앤트로픽사에서는 AI가 '기능적 감정' 알고리즘을 내장하는 것 같다고 보고한 바 있다. AI가 카메라와 연결되면 AI는 인간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AI가 과연 우리 인간과 똑같이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앨런 튜링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난제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AI가 다만 고도의 수학적 계산을 한 결과값을 출력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AI는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연주의자들은 이러한 논증이 오류라고 주장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존재하면 그는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다. 여기서 물질-의식의 이원론과 일원론 간의 오랜 논쟁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 논쟁은 앞으로도 끝없이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차머스의 그 질문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진화는 '의식'을 필연적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을까? 자연선택은 행동에 작용하지, 그 행동에 동반되는 느낌을 선택하지 않는다. 통증의 회피 행동은 생존에 유리하니 선택되지만, 그 회피에 굳이 "아픔의 고통스러운 느낌"이 왜 필요한가? 기능적으로는 느낌 없는 손상 감지 신호로 충분하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아프다. 그 주관적 고통, 이 경험과 의식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는 잉여처럼 보여진다는 말이다. 즉 의식의 난제는, 도대체 왜 인간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마음을 유지하는 데 고도로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환경 최적화를 향해 달려온 진화 과정이 무엇 때문에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마음 내장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는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를 묻고 있다.
순수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1) 의식은 물리 세계의 부차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거나, 2) 고도로 복잡성이 증가할 때 임계점에 도달하자 갑작스럽게 생겼다고 설명한다. 1) 부수현상설은 "쓸모없이 딸려 있다"고 인정할 뿐이고, 2) 창발론은 "복잡해지면 생긴다"는 이름짓기(명명)로 난제 해결을 유보할 뿐이다. 어느 것도 "왜 굳이 경험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깨끗이 해소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그러한 부차적인 현상이 생길 필요가 있었을까? 왜 그런 창발이 굳이 생겨나는 것일까?물리적 기능으로 다 설명되는 세계에서, 경험은 왜 있어야 하는지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5. 영혼 — 불어넣어진 불꽃
이 설명되지 않은 잉여, 이 "그 이상의 것"을 전통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이름으로 불러 왔다. 영혼.
봄이 단순한 자극-반응 이상이라는 것, 경험이 물리적 기능의 잉여로 남는다는 것 — 이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어쩌면 의식은 물질의 상향식 산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물질이 고도로 복잡해져서 의식이 갑자기 위로 쑥 솟아올라온(bottom-up) 것이 아니라, 의식이 다른 질서에서 위에서 아래로 주어진(top-down)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히 "영혼"이라는 고대 언어가 붙들던 직관이다. 영혼은 몸의 기능이 아니라, 몸에 불어넣어진 것이다. 창세기가 인간 창조를 묘사하는 그 장면이 이 직관을 담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נִשְׁמַת חַיִּים, 니쉬마트 하이임, 생명의 호흡)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נֶפֶשׁ חַיָּה, 네페쉬 하야)이 되니라" (창 2:7)
인간은 두 요소로 된다. 흙(물질, 물리적 몸)과 불어넣어진 생기(하나님에게서 온 생명). 의식·영혼은 흙의 복잡한 조합에서 창발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불어넣어진 것이다. 고대 교부들이 영혼의 기원을 논하며 떠올린 이미지 하나가 여기서 빛난다. 한 촛불이 다른 초에 불을 붙이듯, 영혼이 생명에서 생명으로 전해진다는 그림. 이 촛불 비유가 붙드는 핵심은, 의식은 물질의 조합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생명 속생설 식으로 말하자면 영혼 속생설이라고 할까?
불은 스스로 타오르지 않는다. 불은 밖에서 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물질은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다. 하여 기껏해야 좀비에 머문다. 경험의 불꽃은 밖에서, 생명의 근원에서 당겨져야 한다. 우리가 좀비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실제로 보고 느끼는 자라는 것은, 물질이 그렇게 진화해서가 아니라 불꽃이 밖에서 당겨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6. 하나님의 봄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esse est percipi)"이라 했다. 뒤집으면 지각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빛을 '보심'으로써 하나님은 빛의 존재를 온전하게 하신다. 이제 빛은 온전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보심은 빛의 존재를 세운다. "빛이 있으라"는 명령과 함께 빛이 존재했다. 그 빛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보심으로 빛의 '좋음'이 인정되며 객관적인 실재가 된다. 하여 빛과 함께 좋음도 존재하게 되었다. 이로써 빛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빛의 창조 행위는 완결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봄은 창조의 완성이다.
시편이 이를 노래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이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 104:29)
하나님께서 낯을 숨기심, 곧 시선을 거두심은 존재의 위기를 초래한다. 만물은 존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보여지고 있기에 존재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거두시면 우리는 존재의 근거를 잃게 된다. 우리 실존의 위기는 하나님이 더는 우리를 '보시지 않음'에서 온다. 하나님의 봄은 창조의 마지막 박자이자, 존재를 지탱하는 지속적 은혜다.
7. 토브는 관계에서 태어난다
이제 "좋았더라(כִּי־טוֹב, 키 토브)"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토브는 빛 자체의 고립된 속성이 아니다. 그리고 그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실재이다. 하나님이 보심으로써 부여되는 '값'이고 '가치'이다. 빛이 스스로 "나는 좋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시고 좋다 하신다. 즉 피조물의 가치는 그것이 보여지는 관계 안에서 성립하며, 실재한다. 토브라는 가치는 홀로 있는 사물의 성질이 아니라, 보시는 분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관계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관계적 실재이다.
이것이 우리가 봄과 색을 논하며 도달한 결론과 정확히 만난다. 붉은 파장이 볼 자 없어 색이 되지 못했듯이, 빛도 보시는 분 없이는 좋음이 되지 못한다. 색이 봄에서 태어나듯, 좋음이 보심에서 태어난다. 아름다움이 지각하는 인격 없이 완성되지 않듯이, 좋음도 보시는 하나님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조의 부록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확인하는 도장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좋음으로 세우고 지탱하는 능동적 참여이며, 그렇기에 창조의 완성이다. 하나님은 존재를 불러내시는 분일 뿐 아니라, 불러낸 것을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좋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하여 창조는 '언약적 관계 맺음'이다.
이것은 고대 근동 신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인간을 노동력으로 만들어 부려먹을 뿐, 만든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좋다" 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만드신 것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창조는 처음부터 사랑의 시선을 담고 있다.
8. 보여지는 존재의 복
이 봄의 신학은 인간에게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טוֹב מְאֹד, 토브 메오드)" 하신 존재다. 하나님께 보여지는 복이 얼마나 큰가! 하나님의 시선이 외면하는 저주는 얼마나 비참한가! 인간의 깊은 상처는 대개 보여지지 못함에서 온다. 무시당함, 투명인간 취급, 존재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 이것이 수치의 본질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하나가 이것을 보여준다. 광야로 쫓겨난 여종 하갈이, 아무도 보지 않던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부른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보시는) 하나님(אֵל רֳאִי, 엘 로이)이라 하였으니.." (창 16:13)
아무도 보지 않던 여종을 하나님이 보셨을 때, 그녀의 존재가 회복된다. 보여짐이 곧 존엄의 회복이다. 봄이 색을 낳고 좋음을 낳듯이, 하나님의 봄은 짓밟힌 자의 존엄을 다시 세운다. 하나님의 보심이 우리의 기초의 기초이며, 가장 복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하나님이 보시는 곳에서, 빛의 파장은 색이 되고, 흙은 생령이 되고, 여종은 존엄을 회복하며, 우리는 존재한다. 보여진다는 것, 곧 하나님의 축복의 시선 안에 있다는 것이 존재의 근거다.
결론 — 우리가 보는 자인 것은
이 모든 사유의 원이 마침내 한 구절에서 닫힌다. 바울이 창세기 1장 3절을 직접 인용하며 쓴 그 말씀.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바울은 두 종류의 빛을 한 분 하나님의 한 행위로 묶는다. 물리적 빛("빛이 비치라")과 경험적·인식적 빛("아는 빛"). 이것이 의식의 난제에 대한 바울식 응답이다. 빛은 앎을 가능케 한다.
마음의 난제는 묻는다. 물질에서 어떻게 경험이 솟아나는가? 물리적 봄에서 어떻게 경험적 봄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자연주의는 이 다리 앞에서 막힌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4장 6절은 방향을 뒤집는다. 경험은 물리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물리적 빛과 경험적 빛을 같은 분이 각각 주신 것이다.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붉음을 경험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안다. 그러므로 봄은 존재보다 앞선다. 물리적 빛이 먼저 있고 의식이 나중에 그것을 본 것이 아니라, 보시는 분이 먼저 계셔서 "빛이 있으라" 하시고 "보시니 좋았더라" 하셨다. 경험하는 의식이 물질의 파생물이 아니라 물질에 앞서는 근원이다.
우리가 빛을 볼 수 있다는 것, 붉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아름다움 앞에 멈춰 설 수 있다는 것 — 그 평범하고도 놀라운 사실 안에, 물리학도 철학도 다 풀지 못한 신비가 있다. 그리고 그 신비의 뿌리에, 창조의 첫날 빛을 보시고 "좋다" 하신 창조주의 시선이 있다.
우리의 봄은 그분의 봄에서 왔다. 우리가 보는 자인 것은, 먼저 보시는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좀비가 아니라 경험하는 영혼인 것은,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그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 온전히 보게 될 것은, 지금 우리를 온전히 보고 계신 그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우리의 부분적 봄이 언젠가 온전한 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온전함의 근거는 우리의 봄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아신" 그 봄이다. 먼저 보여졌기에, 우리는 보게 된다. 창조의 첫날, 빛이 보여지기 위해 존재했듯이 — 우리 또한 보시는 그분의 시선 안에서, 비로소 존재하고, 좋아지고, 온전해진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한마디 안에, 창조의 완성과 우리 존재의 근거가 함께 있다.
창세기 1장 2절의 마지막 구절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단 한 줄이지만 놀라울 만큼 깊은 신학적 무게를 가진다. 이 한 구절 안에 우주적 공간의 구조, 창조의 방식, 출애굽 구속과의 연결, 그리고 후일 삼위일체 신학으로 발전할 신적 다수성의 씨앗이 모두 담겨 있다.
1. 수면이란 어디인가
가장 먼저 생가할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셨다는 그 '수면 위'는 어디를 말하는가?
"하나님의 영이 수면(פְּנֵי הַמָּיִם, 페네 하마임)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수면이 어떤 곳인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2절의 물(마임)이 무엇인지를 확정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H₂O가 아니라 아직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 통합물로 봐야 할 것이다. 6-8절에서 라키아(궁창)가 창조되어 물을 위아래로 가르기 전까지 이 물은 다음을 모두 통합한 미분화 상태다.
미래의 궁창 위의 물 (2층천 영역)
미래의 1층천 공간 (라키아가 들어설 자리)
미래의 바다
미래의 육지 (아직 물 아래 잠겨 있음)
땅 속 깊음의 샘들
즉 2절의 물은 미래의 다층 우주 전체가 미분화 상태로 통합된 거대한 원시 수계, 혹은 물 덩어리이다. 따라서 그 표면으로서 '수면 위'는 보다 정교하게 창조되기 직전 미분화된 우주 전체의 표면이다.
'페네(פְּנֵי)'라는 단어는 단순히 "표면"이 아니라 '얼굴'이라는 뜻도 가진다. 하나님의 영이 원초적 물과 대면하시는 이미지가 형성된다. 하나님의 영이 당신께서 창조를 해 나가실 그 미분화된 창조 세계를 긴장감을 가지고 조우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수면의 위 공간은 어디를 말하는가? 아직 라키아도, 별들의 공간도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 질료 상태의 땅 위라면 이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씀하신 '하늘'이 아니겠는가? 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때 하늘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3층천일 것이고 땅은 아직 미분화 상태인 거대한 물덩어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은 3층천 (샤마임, 하나님의 처소)* 에서 거대한 물 덩어리를 내려다 보시고 계시는 장면이 아닐까? 이것은 1절의 하늘(샤마임)이 이후 본문에서 다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조화를 이룬다. 이후에는 2층천, 1층천, 바다, 육지, 깊음의 샘들만 나온다. — 제3천의 창조는 1절에서 이미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제3천 (1절에서 창조 완료) ←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공간
═══════════════════════ ← 수면 (페네 하마임)
원초적 통합물
땅 (토후 바보후 상태)
이 구조가 가지는 신학적 함의는 깊다. 창조는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다. 제3천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 원초적 혼돈의 표면을 향해 아래로 임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영의 강림에는 신들의 전쟁 모티브가 없다. 폭력적 정복도 아니고 갈등도 아닌 부드러운 강림으로 임하실 뿐이다. 마치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로 보듬는 것 같이, 마치 독수리가 새끼를 날개로 업어 나르듯이 그렇게 부드럽게 모성애적 사랑으로 임하신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창세기의 창조는 처음부터 하강하는 임재의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조는 훗날 성육신의 신학으로 이어진다 —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는 하나님.
2. 메라헤페트(מְרַחֶפֶת) — 창조와 출애굽을 잇는 신학적 다리
하나님의 영의 행위, '운행하시다'를 묘사하는 동사 메라헤페트는 매우 독특한 단어다. 이 동사는 '라하프'에서 나온 단어인데 날개를 너풀거리다는 뜻이다. 구약 전체에서 이 동사는 단 몇 차례만 나타나는데, 2절과 평행이 되는 본문이 신명기 32장 11절이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라하프)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노래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노래한다. 즉 같은 동사가 창조의 영과 광야의 보호자를 동시에 묘사한다. 이 평행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창세기 1장 2절이 단지 우주 창조의 사건이 아니라 출애굽 구속 사건과 신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곧 하나님의 구속 행위이시다. 혼돈과 공허로부터 하나님은 만물을 구속해 내신다.
창세기(창조)와 출애굽(구속)의 평행 구조
출애굽 사건을 자세히 보면 창세기 1장과 놀랍도록 평행한 구조가 드러난다.
① 영(루아흐)이 물 위에 움직임
창세기 1:2 —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출애굽기 14:21 — "여호와께서 큰 동풍(루아흐)을 일으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같은 단어 **루아흐(רוּחַ)**가 사용된다. 창조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출애굽에서는 하나님의 바람이 물 위를 움직인다.
② 물이 갈라짐
창세기 1:6-7 — 라키아로 물과 물이 나뉨
출애굽기 14:21-22 — "물이 갈라지니... 좌우에 벽이 되어"
③ 마른 땅이 드러남
창세기 1:9-10 — "뭍이 드러나라...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출애굽기 14:22 —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고"
같은 어휘 **야바샤(יַבָּשָׁה, 마른 땅)**가 양쪽에서 사용된다.
④ 새로운 생명의 시작
창조 — 인간의 등장과 통치권 부여
출애굽 —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과 언약 백성으로의 부르심
신학적 함의
이 평행은 무엇을 말하는가? 출애굽은 단순한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새 창조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원초적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부여하셨듯이,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혼돈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백성을 빚어내신다.
그리고 이 평행 구조 안에서 메라헤페트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듯, 하나님의 영은 원초적 혼돈 위에 부드럽게 임하셔서 그것을 품으신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그 동일한 보호의 임재가 우주 창조의 첫 순간에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창조와 구속이 동일한 하나님의 동일한 행위 양식임을 보게 된다. 창조하시는 하나님과 구속하시는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위에 너풀거리신 그 영이 곧 태초의 혼돈 위에 운행하신 그 영이다. 이 통찰은 이사야가 출애굽을 새 창조로 묘사하는 본문들에서도 확인된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이사야 51:9-10)
여기서 이사야는 창조 때의 바다 정복(라합과의 싸움)과 출애굽의 홍해 갈라짐을 같은 사건의 두 측면으로 노래한다.
3. 왜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영"인가 — 신적 다수성의 신비
이제 우리는 가장 까다로운 신학적 질문 앞에 선다. 본문은 왜 "하나님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라고 하지 않고 굳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라고 했는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 어떤 구분을 도입한다.
다신론적 위험성
이 표현은 엄격한 유일신론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을 구분한다는 것은 신적 영역 안에 다수성을 인정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의 다신론적 환경에서 이런 표현은 충분히 오해될 수 있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에는 신적 다수성을 시사하는 표현이 곳곳에 등장한다.
엘로힘(אֱלֹהִים) — 단수가 아닌 복수형의 신명
"우리의 형상대로" (창 1:26) — 1인칭 복수
"하나님의 영" (창 1:2) — 하나님과 그분의 영의 구분
이 모든 표현이 함께 작용하여 창세기는 단순한 유일신론도, 다신론도 아닌 신비로운 신적 다수성의 신학을 형성한다. 하나의 하나님이시되 그 안에 어떤 복수적 차원이 있다는 것.
왜 이런 위험을 감수했는가
창세기 저자는 다신론적 오해의 위험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왜인가? 몇 가지 가능한 답이 있다.
① 창조 행위의 협력적 성격
창조는 단순한 일방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내적 협력을 통해 일어난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발해진다. 이 모든 차원이 하나의 하나님 안에서 함께 작동한다.
② 임재의 양식의 구별
"하나님 자체"와 "하나님의 영"은 다른 분이 아니지만, 임재의 양식이 구별된다. 하나님의 본질은 초월적이지만, 하나님의 영은 피조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내재적 임재다. 본문이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창조 행위의 이 내재적 차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③ 계시의 씨앗
가장 깊은 답은 이것일 수 있다. 창세기 저자가 의식했든 아니든, 이 표현은 후일 성경 전체를 통해 펼쳐질 더 큰 계시의 씨앗이다. 하나님 안의 다수성, 곧 우리가 후일 삼위일체라고 부르게 될 그 신비의 첫 번째 흔적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면 다신론적 위험은 감수된 것이 아니라 계시의 필연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단순한 단자(monad)로 계시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그 광대하심고 크고 위대하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하나님을 유일하신 신으로 고백할 때, 이는 우리 신앙의 정절을 요구하며, 우상에 대해서 거리를 두라는 계명을 상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단수로만 표현할 때, 자칫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크고 위대하심의 차원이 약화될 수 있다. 마치 인간이 하나님을 '이름부를 수 있으며' '어떤 대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듯' 착각할 수 있다. 하여 다신론을 피하면서도 하나님의 무한히 풍성하신 존재를 복수성, 혹은 다수성을 암시하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아닐까? 이것이 창세기 기자가 처음부터 자신 안의 어떤 풍성한 다수성을 암시한 이유가 아닐까?
4. 창조의 동역자들 — 영, 지혜, 말씀
창세기 1장 2절에서 시작된 이 다수성의 암시는 성경 전체를 통해 점차 더 풍성하게 펼쳐진다. 특히 세 가지 표상이 창조의 동역자로 등장한다 — 영(루아흐), 지혜(호크마), 말씀(다바르/로고스).
① 창조의 영 (루아흐 엘로힘)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영"은 그 자체로 창조의 첫 동역자다. 어미 새가 알을 품듯 부드럽게 임하시는 영. 시편은 이 영의 창조적 활동을 더욱 명시적으로 노래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루아흐)으로 이루었도다" (시편 33:6)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편 104:30)
영은 단지 창조의 시작에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지속적인 생명의 원천이시다.
② 창조의 지혜 (호크마)
잠언 8장은 신학적으로 매우 놀라운 본문이다. 여기서 지혜가 인격적 존재로 의인화되어 자기 자신에 대해 노래한다. 그리고 그 지혜는 명시적으로 창조의 동역자로 등장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아몬, אָמוֹן)**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느니라" (잠언 8:22-30)
여기서 **아몬(אָמוֹן)**이라는 단어는 "창조자" 혹은 "장인(master craftsman)"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지혜는 단순히 창조의 관찰자가 아니라 창조의 협력자다. 이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본문이다. 지혜가 의인화되어 하나님 곁에서 창조에 참여하는 모습은 다신론적 위험성을 한층 더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잠언 저자는 다신론을 의도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안의 어떤 창조적 다수성을 시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③ 창조의 말씀 (다바르/로고스)
세 번째이자 가장 결정적인 동역자는 말씀이다. 창세기 1장 전체는 "하나님이 이르시되"의 반복으로 구성된다. 빛, 궁창, 땅과 바다, 식물, 광명체, 동물 —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다. 이 창조의 말씀이 신적 차원에서 인격화되는 것이 요한복음 1장이다.
"태초에 **말씀(로고스, λόγος)**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요한복음은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베레쉬트)를 의도적으로 반향한다. 그리고 창세기의 말씀이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인격적 로고스이며, 그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동시에 곧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한다. 이로써 창세기 1장에 흩어져 있던 신적 다수성의 암시들이 신약에서 명시적 신학으로 결정화된다.
5. 세 동역자의 종합 — 삼위일체 신학의 씨앗
영, 지혜, 말씀 — 이 세 표상은 후일 기독교 삼위일체 신학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영 ────→ 성령
잠언 8장의 지혜 ────→ 성자 (교부적 해석)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 ────→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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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하나님 안의 세 위격
특히 초대 교회 교부들은 잠언 8장의 지혜를 성자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 골로새서 1장 15-17절은 이 동일시를 명시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가 잠언 8장의 지혜와 정확히 같은 역할 — 창조보다 먼저 존재하시며 창조의 협력자 — 을 수행하신다는 점이 분명하다.
한 분 하나님, 그러나 풍성한 다수성
이로써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의 한 구절이 얼마나 깊은 신학적 토대를 놓았는지 보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이 한 줄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신적 다수성의 첫 계시다. 이 다수성은 다신론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다신론 vs. 성경의 신적 다수성
신적 존재의 수
여러 신
한 하나님
신들의 관계
갈등, 경쟁, 협상
완전한 일치와 사랑
창조 방식
신들의 협상이나 전쟁
한 의지의 다양한 표현
본질
본성적으로 분리
본질적으로 하나
성경의 다수성은 하나님 밖에 다른 신들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풍성한 차원들이 있다는 의미다. 한 분 하나님이시되 그 한 분 안에 영과 지혜와 말씀이 함께 거하신다.
6. 결론 — 한 줄의 신학적 무게
창세기 1장 2절의 마지막 한 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표면적으로는 우주 창조의 한 장면을 묘사할 뿐이지만, 그 안에는 성경 전체의 신학이 응축되어 있다. 수면은 제3천에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원초적 혼돈이 만나는 우주적 표면이다. 창조는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며, 이것은 후일 성육신의 신학으로 이어진다. **운행하시니라(메라헤페트)**는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품듯 부드러운 임재를 묘사하며, 동시에 출애굽 구속과 창조를 신학적으로 연결한다. 창조와 구속은 같은 하나님의 같은 행위 양식이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은 신적 다수성의 첫 흔적이다. 이 다수성은 잠언의 지혜와 요한복음의 로고스로 점차 확장되며, 마침내 삼위일체 신학으로 결정화된다. 이 모든 것이 한 줄에 담겨 있다. 창세기 1장 2절의 마지막 구절은 단순한 우주론적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창조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구속이 어떻게 창조와 연결되는지, 그리고 하나님 안의 신비로운 풍성함이 어떤 것인지를 한꺼번에 선언하는 신학적 압축이다.
태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그 한 순간 안에 이미 모든 것이 있었다 — 창조하시는 하나님, 임재하시는 영, 곧 발해질 말씀, 그리고 그 말씀과 영의 협력. 한 분 하나님의 풍성한 다수성. 알을 품는 어미 새의 사랑. 그 영이 곧 광야의 이스라엘 위에 너풀거리시고, 그 말씀이 마침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그 지혜가 만물의 앞에 계시고 또 만물 안에 함께 서신다. 창세기 1장 2절의 한 줄은 결국 요한복음 1장 14절로 흘러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그 영이 마침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셨다. 이것이 창세기 1장 2절의 마지막 줄이 향하는 최종 목적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