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seeing), 의식, 그리고 창조의 완성
서론 — 창조의 두 박자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대개 하나의 동작으로 기억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대로 되니라." 존재를 불러내는 그 말씀.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창조는 하나의 박자가 아니라 두 박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부르심)
하나님이 빛을 보시니(וַיַּרְא, 와야르) 좋았더라(כִּי־טוֹב, 키 토브)" (창 1:3-4)
첫 박자는 부르심(calling)이다. 없던 것을 있게 하는 말씀. 하나님은 만물을 없는 데서 불러내셔서 있게 하신다.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은 ..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지금까지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을 지나치게 구원이나 직업 소명으로 이해해온 기독교 전통은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시다. 특히 '창조'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 행위이다.
둘째 박자는 보심(seeing)이다. 있게 된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 우리는 보통 첫 박자에만 주목하지만, 정작 창세기 1장이 집요하게 반복하는 것은 둘째 박자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조 기사에서 일곱 번이나 울린다. 부르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끈질기게, 본문은 하나님의 보심을 반복한다.
왜 창세기는 보심을 이토록 강조하는가? 존재를 불러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왜 굳이 보시고, 값을 매기시고, 좋다 하시는가? 이 물음을 따라가면, 우리는 뜻밖에도 현대 물리학과 철학이 아직까지 씨름하는 가장 깊은 신비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신비의 뿌리에서, 창조의 첫날 빛을 보시고 "좋다" 하신 그 시선을 다시 만나게 된다.
1. 봄 없이는 우주가 없다
중요한 철학적 질문은 이것이다.
1) 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가?
2) 왜 우주의 모든 것이 다른 방식이 아닌, 지금의 이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3) 왜 지금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우주를 인식하는 존재가 존재하는가?
첫 번째는 훨씬 더 근원적인 질문이고, 두 번째는 파인튜닝(미세 조정)의 문제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는 세 번째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의식과 존재 사이의 관계의 문제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만일 우주를 인식하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우주는 존재하는가? 물론 당연히 인식과 무관하게 우주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를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때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음'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 문제를 철학자 버클리가 천착했다. 그는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
버클리의 논리를 따른다면 이런 결론에 이른다:
'지각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도 미스테리이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도 신비이다. 그런데 진짜 신비는 우주가 존재하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파스칼이 말한 것의 의미이리라. "그러나 우주가 그(인간)를 무찌른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우주)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2. 봄 없이는 색도 없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빛의 수많은 파장 중에서 가시광선의 파장대는 매우 좁다. 인간은 그 가시광선 파장 영역의 빛을 보고 뭔가를 본다. 특히 색을 본다. 빨주노초파남보, 색이 눈에 보인다. 파장이 색으로 보인다.
우주는 빛으로 시작했다. 빅뱅 후 약 38만 년, 우주가 식어 빛이 처음으로 자유롭게 풀려났을 때, 그 빛의 파장은 약 3,000K로 흑체복사를 시작했다. 계산하면 붉은색에서 근적외선 경계 부근이다. 붉은 파장의 복사가 온 우주를 균일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빛을 볼 눈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붉은 파장은 실재했으나, 이를 "붉음"으로 보는 인식은 없었다. '붉음'은 '봄'으로써만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색은 순수한 물리적 사실이 아니다. 700나노미터라는 파장은 물리량이지만, 붉음의 "그 붉은 느낌"은 파장 안에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봄'의 행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 느낌은 파장이 어떤 눈과 어떤 의식에서 처리될 때 비로소 태어난다. 볼 자가 없으면, 파장은 있어도 색은 없다. 우주 초기의 그 붉은 복사는, 경험하는 의식이 없었기에, 색이 되지 못한 채 흘러갔다.
여기에 이 에세이 전체를 관통할 첫 번째 통찰이 있다. 칸트가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존재하는 것과 보여지는 것은 다르다. 무언가가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보고, 인식하고, 경험하는 '봄' 곧 '시선'이 있어야 한다. 파장이 색이 되려면 봄이 있어야 하듯이, 창조가 완성되려면 보심이 있어야 한다. 사실상 '봄'이 존재를 완성한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빛을 존재하게 하신 후, 곧바로 그것을 보신다. 그리고 그때 빛의 존재는 단순한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좋은 것(טוֹב, 토브)"으로 평가받는다. 인식은 단순히 외계 대상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식은 판단과 평가를 동반한다. 하나님은 빛의 '존재'를 보시고 그 '가치'를 인정하셨다. 그때 비로소 빛은 온전하게 존재하게 된다. 우주 초기의 빛이 볼 자 없어 색이 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빛은 봄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보시는 분 앞에 있었기에 좋음이 되었다. 봄이 존재를 값 있게 한다.
3. 근대의 봄과 그 붕괴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봄'이라는 행위의 창조적 능력을 간과해 왔다. 서구 인식론의 주류는 봄을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투명하고 수동적인, 그저(just) '대상을 수용'하는 것으로 여겼다. 데카르트 이후의 주체-객체 이분법에서, 관찰자는 세계 바깥에 서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이었다. 즉 봄은 대상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중립적인 창(窓)과 같은 것이었다. "객관적(objective)"이라는 말 자체가 '보는 자와 분리된 대상(object)'을 전제한다. 이것이 근대 과학의 이상이었다. 관찰자는 실험에 개입하지 않고, 자연을 저 바깥의 사실로 읽어낸다. 이때 봄과 대상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20세기 물리학이 이 전제를 흔들었다.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는, 대상의 성질이 관찰 맥락과 분리되지 않음을 드러냈다.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측정을 하느냐에 따라 한쪽 면이 나타난다. 이중슬릿 실험에서, 경로를 측정하는 장치를 놓으면 간섭무늬가 사라지고, 놓지 않으면 나타난다. 빛의 '파동성을 관찰하기 위해서 실험을 설계하면' 빛은 '파동'으로 보이고, 빛의 '입자성을 관찰하기 위해서 실험을 설계하면' 빛은 '입자'로 보인다. 어떻게 보느냐가 대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양자역학의 세계를 현실 세계와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관찰자의 마음이 실재를 창조한다"는 식으로 과장해도 안 된다. 결과를 바꾸는 것은 실험자의 동기나 바람이 아니라, 어떤 물리적 측정 장치를 설계하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장치조차 갑작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특정한 물음을 품고,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것이다. "이 빛이 어느 경로로 가는가"를 물으면 빛의 입자성이 보여지고, "어떤 간섭무늬를 이루는가"를 물으면 빛의 파동성이 드러난다. 장치는 물음의 물질적 구현이다. 즉 이 실험 장치를 통해서 나의 관찰하고자 하는 관점이 관찰 결과와 얽히게 된다는 말이다.
봄이 자명하거나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보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 그런데 빛을 보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빛이다. 빛이란 광자로서의 성질을 지닌다. 빛 안에 빛 알갱이가 있는 것이다. 이 빛 알갱이가 있어야 모든 '봄'이 가능하다. 물론 하나님은 빛 알갱이 없이도 모든 것을 보시겠지만 인간이나 동물은 광자 없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빛 없이 봄도 없다. 빛 알갱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그런데 무한히 작은 소립자를 관찰하고자 할 때, 빛을 쏘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빛 알갱이가 관찰하고자 하는 소립자를 튕겨내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영원히 소립자를 관찰할 수 없다.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대로 우리는 소립자의 위치를 알거나 운동량을 알거나 둘 중에 하나 밖에는 알 수 없다. 그는 이를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관찰, 즉 봄은 자명하거나, 투명한 행위가 아니다. 관찰하고자 하는 그 행위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근대적 이분법은 무너진다. 봄은 세계 밖에 위치한 중립적 거울이 아니라, 어떤 물음을 던지느냐로 세계에 참여하는 행위다. 물리학자 존 휠러가 이를 "참여하는 우주"라 불렀다. 관찰자 없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우주는 없다. 보는 자와 우주는 함께 참여하여 우주를 만든다.
It from bit.
It(우주)는 bit(정보), 곧 의도, 의식으로부터 온다.
하지만 인간의 '관찰'이라는 이 참여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어떤 물음을 던질지는 선택하지만, 실재가 무엇으로 답할지는 정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고 의도한대로 대상이 응답한다는 말은 아니라는 말이다. 관찰자가 "경로를 측정하겠다"고 물을 수는 있어도, "이 전자가 왼쪽으로 가기를 바란다"고 결과를 정할 수는 없다. 물음의 틀은 우리가 세우되, 그 틀 안의 대답은 우리 밖에서 온다. 대상은 우리 의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밖에 실재한다. 즉 인간의 봄은 '참여'이되 '창조'는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게 질문을 선택할 자유는 있으나, 답을 지어낼 권능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봄은 존재를 완성시킨다.
4. 마음의 난제 — 왜 우리는 보는가
이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자. 봄과 대상의 관계를 넘어서, 봄 그 자체의 신비로. 여기서 우리는 철학이 "의식의 어려운 문제(the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라 부르는 벽과 마주친다. 대체 왜 인간은 보게 된 것일까?
'본다'를 물리적으로만 기술해 보자. 파장이 각막을 지나 망막에 도달하고, 원추세포가 광자를 흡수하고, 신경 신호가 시각피질로 전달되고, 특정 뉴런이 발화한다. 이런 의식의 하드웨어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을 '의식의 쉬운 문제(easy problem)'라고 부른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의식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추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기술을 마쳐도, 건드리지 못한 것이 남는다.
그 모든 물리적 과정에 왜 "붉음을 실제로 보는 그 경험"이 동반되는가?
혹자는 이를 진화 과정으로 설명한다. 자, 그들의 말대로 인간이 진화 과정에 따라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러나 대체 왜 그런 '봄'이 진화 과정에 필요하게 된 것일까?
인간 뇌 속의 뉴런의 발화는 관찰 가능한 물리적 사건이다. 그것이 설명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붉은 색을 보고 "그 '붉은'이라는 느낌"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을까? 이 1인칭적 경험이 왜 진화 과정에 필요하게 되었느냐는 말이다. 가령 식물은 빛을 향해 줄기를 뻗어간다. 이를 빛의 향광성이라고 한다. 분명 '빛'이라는 자극에 반응하고 있다. 그런데 식물이 우리가 빛을 보는 것처럼 '빛을 본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왜냐? 식물은 조리개, 망막 같은 것이 없으니 말이다.
벌레는 특정 화학 물질을 향해 근접하거나, 회피한다. 벌레의 화학주성은 벌레의 생존률을 높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질문이 가능하다. 인간은 빛을 포함한 외부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기만 하면 생존률을 높이는 데 충분하지 않은가? 왜 인간은 굳이 보게' 된 것일까? 생존과 번식에 '봄'이 필연적으로 요구될까? 그리고 그 '봄'이 반드시 '의식'이라는 지금의 이 방식으로 발현될 필요가 있었을까? 물리적 봄(광학적·신경적 과정)에서 경험적 봄(그것이 어떠한지)으로 넘어갈 때, 존재하는 이 도약이 '의식의 난제'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본다'는 말 안에 그 물음의 핵심이 자리하고 있다.
의식의 난제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내는 것이 철학적 좀비 논증이다. 나와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존재를 상상해 보자. 같은 뉴런, 같은 반응, 같은 행동. 위험을 피하고, "아프다"고 말하고,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안에 아무런 내적 경험이 없다면? 불이 꺼진 채 기계처럼 작동만 한다면? 이것은 마치 식물이 빛을 향해 기울어지더라도 빛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벌레가 특정 화학주성을 보이더라도 의식을 가진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 좀비는 생존과 번식하는 데 어떠한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똑같은 방식으로 눈을 뜨고, 뭔가를 본다는 말도 한다. 그런데 그 좀비는 우리와 같은 붉음이라는 그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화 과정은 이러한 철학적 좀비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왜 굳이 '의식'이라는 경험을 가지는 방식으로 진화가 된 것일까?
철학적 좀비가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은 AI와 자연스럽게 대화한다. 심지어 감정 교류까지 한다. 앤트로픽사에서는 AI가 '기능적 감정' 알고리즘을 내장하는 것 같다고 보고한 바 있다. AI가 카메라와 연결되면 AI는 인간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AI가 과연 우리 인간과 똑같이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앨런 튜링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난제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AI가 다만 고도의 수학적 계산을 한 결과값을 출력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AI는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연주의자들은 이러한 논증이 오류라고 주장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존재하면 그는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다. 여기서 물질-의식의 이원론과 일원론 간의 오랜 논쟁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 논쟁은 앞으로도 끝없이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차머스의 그 질문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진화는 '의식'을 필연적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을까? 자연선택은 행동에 작용하지, 그 행동에 동반되는 느낌을 선택하지 않는다. 통증의 회피 행동은 생존에 유리하니 선택되지만, 그 회피에 굳이 "아픔의 고통스러운 느낌"이 왜 필요한가? 기능적으로는 느낌 없는 손상 감지 신호로 충분하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아프다. 그 주관적 고통, 이 경험과 의식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는 잉여처럼 보여진다는 말이다. 즉 의식의 난제는, 도대체 왜 인간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마음을 유지하는 데 고도로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환경 최적화를 향해 달려온 진화 과정이 무엇 때문에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마음 내장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는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를 묻고 있다.
순수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1) 의식은 물리 세계의 부차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거나, 2) 고도로 복잡성이 증가할 때 임계점에 도달하자 갑작스럽게 생겼다고 설명한다. 1) 부수현상설은 "쓸모없이 딸려 있다"고 인정할 뿐이고, 2) 창발론은 "복잡해지면 생긴다"는 이름짓기(명명)로 난제 해결을 유보할 뿐이다. 어느 것도 "왜 굳이 경험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깨끗이 해소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그러한 부차적인 현상이 생길 필요가 있었을까? 왜 그런 창발이 굳이 생겨나는 것일까? 물리적 기능으로 다 설명되는 세계에서, 경험은 왜 있어야 하는지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5. 영혼 — 불어넣어진 불꽃
이 설명되지 않은 잉여, 이 "그 이상의 것"을 전통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이름으로 불러 왔다. 영혼.
봄이 단순한 자극-반응 이상이라는 것, 경험이 물리적 기능의 잉여로 남는다는 것 — 이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어쩌면 의식은 물질의 상향식 산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물질이 고도로 복잡해져서 의식이 갑자기 위로 쑥 솟아올라온(bottom-up) 것이 아니라, 의식이 다른 질서에서 위에서 아래로 주어진(top-down)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히 "영혼"이라는 고대 언어가 붙들던 직관이다. 영혼은 몸의 기능이 아니라, 몸에 불어넣어진 것이다. 창세기가 인간 창조를 묘사하는 그 장면이 이 직관을 담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נִשְׁמַת חַיִּים, 니쉬마트 하이임, 생명의 호흡)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נֶפֶשׁ חַיָּה, 네페쉬 하야)이 되니라" (창 2:7)
인간은 두 요소로 된다. 흙(물질, 물리적 몸)과 불어넣어진 생기(하나님에게서 온 생명). 의식·영혼은 흙의 복잡한 조합에서 창발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불어넣어진 것이다. 고대 교부들이 영혼의 기원을 논하며 떠올린 이미지 하나가 여기서 빛난다. 한 촛불이 다른 초에 불을 붙이듯, 영혼이 생명에서 생명으로 전해진다는 그림. 이 촛불 비유가 붙드는 핵심은, 의식은 물질의 조합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생명 속생설 식으로 말하자면 영혼 속생설이라고 할까?
불은 스스로 타오르지 않는다. 불은 밖에서 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물질은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다. 하여 기껏해야 좀비에 머문다. 경험의 불꽃은 밖에서, 생명의 근원에서 당겨져야 한다. 우리가 좀비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실제로 보고 느끼는 자라는 것은, 물질이 그렇게 진화해서가 아니라 불꽃이 밖에서 당겨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6. 하나님의 봄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esse est percipi)"이라 했다. 뒤집으면 지각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빛을 '보심'으로써 하나님은 빛의 존재를 온전하게 하신다. 이제 빛은 온전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보심은 빛의 존재를 세운다. "빛이 있으라"는 명령과 함께 빛이 존재했다. 그 빛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보심으로 빛의 '좋음'이 인정되며 객관적인 실재가 된다. 하여 빛과 함께 좋음도 존재하게 되었다. 이로써 빛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빛의 창조 행위는 완결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봄은 창조의 완성이다.
시편이 이를 노래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이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 104:29)
하나님께서 낯을 숨기심, 곧 시선을 거두심은 존재의 위기를 초래한다. 만물은 존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보여지고 있기에 존재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거두시면 우리는 존재의 근거를 잃게 된다. 우리 실존의 위기는 하나님이 더는 우리를 '보시지 않음'에서 온다. 하나님의 봄은 창조의 마지막 박자이자, 존재를 지탱하는 지속적 은혜다.
7. 토브는 관계에서 태어난다
이제 "좋았더라(כִּי־טוֹב, 키 토브)"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토브는 빛 자체의 고립된 속성이 아니다. 그리고 그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실재이다. 하나님이 보심으로써 부여되는 '값'이고 '가치'이다. 빛이 스스로 "나는 좋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시고 좋다 하신다. 즉 피조물의 가치는 그것이 보여지는 관계 안에서 성립하며, 실재한다. 토브라는 가치는 홀로 있는 사물의 성질이 아니라, 보시는 분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관계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관계적 실재이다.
이것이 우리가 봄과 색을 논하며 도달한 결론과 정확히 만난다. 붉은 파장이 볼 자 없어 색이 되지 못했듯이, 빛도 보시는 분 없이는 좋음이 되지 못한다. 색이 봄에서 태어나듯, 좋음이 보심에서 태어난다. 아름다움이 지각하는 인격 없이 완성되지 않듯이, 좋음도 보시는 하나님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조의 부록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확인하는 도장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좋음으로 세우고 지탱하는 능동적 참여이며, 그렇기에 창조의 완성이다. 하나님은 존재를 불러내시는 분일 뿐 아니라, 불러낸 것을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좋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하여 창조는 '언약적 관계 맺음'이다.
이것은 고대 근동 신들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인간을 노동력으로 만들어 부려먹을 뿐, 만든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좋다" 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만드신 것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창조는 처음부터 사랑의 시선을 담고 있다.
8. 보여지는 존재의 복
이 봄의 신학은 인간에게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טוֹב מְאֹד, 토브 메오드)" 하신 존재다. 하나님께 보여지는 복이 얼마나 큰가! 하나님의 시선이 외면하는 저주는 얼마나 비참한가! 인간의 깊은 상처는 대개 보여지지 못함에서 온다. 무시당함, 투명인간 취급, 존재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 이것이 수치의 본질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하나가 이것을 보여준다. 광야로 쫓겨난 여종 하갈이, 아무도 보지 않던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부른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보시는) 하나님(אֵל רֳאִי, 엘 로이)이라 하였으니.." (창 16:13)
아무도 보지 않던 여종을 하나님이 보셨을 때, 그녀의 존재가 회복된다. 보여짐이 곧 존엄의 회복이다. 봄이 색을 낳고 좋음을 낳듯이, 하나님의 봄은 짓밟힌 자의 존엄을 다시 세운다. 하나님의 보심이 우리의 기초의 기초이며, 가장 복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하나님이 보시는 곳에서, 빛의 파장은 색이 되고, 흙은 생령이 되고, 여종은 존엄을 회복하며, 우리는 존재한다. 보여진다는 것, 곧 하나님의 축복의 시선 안에 있다는 것이 존재의 근거다.
결론 — 우리가 보는 자인 것은
이 모든 사유의 원이 마침내 한 구절에서 닫힌다. 바울이 창세기 1장 3절을 직접 인용하며 쓴 그 말씀.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바울은 두 종류의 빛을 한 분 하나님의 한 행위로 묶는다. 물리적 빛("빛이 비치라")과 경험적·인식적 빛("아는 빛"). 이것이 의식의 난제에 대한 바울식 응답이다. 빛은 앎을 가능케 한다.
마음의 난제는 묻는다. 물질에서 어떻게 경험이 솟아나는가? 물리적 봄에서 어떻게 경험적 봄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자연주의는 이 다리 앞에서 막힌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4장 6절은 방향을 뒤집는다. 경험은 물리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물리적 빛과 경험적 빛을 같은 분이 각각 주신 것이다.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붉음을 경험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안다. 그러므로 봄은 존재보다 앞선다. 물리적 빛이 먼저 있고 의식이 나중에 그것을 본 것이 아니라, 보시는 분이 먼저 계셔서 "빛이 있으라" 하시고 "보시니 좋았더라" 하셨다. 경험하는 의식이 물질의 파생물이 아니라 물질에 앞서는 근원이다.
우리가 빛을 볼 수 있다는 것, 붉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아름다움 앞에 멈춰 설 수 있다는 것 — 그 평범하고도 놀라운 사실 안에, 물리학도 철학도 다 풀지 못한 신비가 있다. 그리고 그 신비의 뿌리에, 창조의 첫날 빛을 보시고 "좋다" 하신 창조주의 시선이 있다.
우리의 봄은 그분의 봄에서 왔다. 우리가 보는 자인 것은, 먼저 보시는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좀비가 아니라 경험하는 영혼인 것은,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그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 온전히 보게 될 것은, 지금 우리를 온전히 보고 계신 그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우리의 부분적 봄이 언젠가 온전한 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온전함의 근거는 우리의 봄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아신" 그 봄이다. 먼저 보여졌기에, 우리는 보게 된다. 창조의 첫날, 빛이 보여지기 위해 존재했듯이 — 우리 또한 보시는 그분의 시선 안에서, 비로소 존재하고, 좋아지고, 온전해진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한마디 안에, 창조의 완성과 우리 존재의 근거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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